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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들의 각종 소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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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 소개 - 정진석 천주교 서울대교구 대주교

조회 수 12491 추천 수 0 2006.11.20 20:00:00
화학생물관리자
『생명을 과학에 맡기는 것은 인간의 탐욕에 생명을 내주는 일』
 
『학교 선택권을 줘야 私學의 본래 의미 살아… 30년 평준화를 고칠 때가 왔다. 私學法은 再개정해야 한다』

鄭鎭奭 대주교
1931년 서울 출생. 서울大 화학공학과 중퇴. 가톨릭大 신학부·로마 우르바노大 대학원 졸업(교회법 석사). 서강大 명예법학 박사. 1961년 사제서품. 성신高 교사, 청주교구장 주교,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의장 역임. 現 서울대교구장. 저서 「교회법 해설」, 「목동의 노래」 등.
金泰完 月刊朝鮮 기자 (kimchi@chosun.com
한국전쟁 직전 서울大 공대 입학
 지난 1월5일 오후 서울 명동성당을 찾았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鄭鎭奭(정진석·74·니콜라오) 대주교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許榮燁(허영엽·홍보실장) 신부의 안내로 鄭대주교의 집무실에 갔다.
 
  『제가 이런 것을 잘 못해요. 아는 게 없다고 스스로 늘 생각하며 살아왔어요. 질문을 받는다는 게 편하지 않아요』
 
  鄭대주교는 손사래부터 쳤다. 인터뷰가 내키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인터뷰를 위해 자료조사를 해보니, 언론과의 인터뷰 기록이 거의 全無(전무)했다. 그런데 막상 이야기가 시작되자 鄭대주교는 서울 토박이의 느린 말투로 예정시간을 훨씬 넘겨서까지 자신의 삶과 신앙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鄭대주교는 1931년 12월 서울에서 태어났다. 친가·외가 모두 독실한 가톨릭 집안으로 어머니가 아들이 주교가 되는 태몽을 꾸었다고 한다.
 
  그는 한국전쟁이 일어나던 해인 1950년 서울大 공대(화학공학과)에 입학, 발명가의 꿈을 키웠다. 6·25라는 「거대한」 죽음의 체험이 그를 司祭(사제)의 길로 이끌었다. 국민방위군으로 소집돼 죽음의 行軍(행군)을 하면서, 戰爭이 끝날 때까지 美軍 병참기지에서 일하면서 그는 『영적 갈등을 너무 많이 느꼈다』고 했다.
 
 
  生命을 파괴하는 文明의 利器에 절망
 
  그는 인간이 발명해 낸 문명의 利器(이기)들이 生命(생명)을 파괴하는 참혹한 광경을 전쟁터에서 지켜보면서, 발명가가 되겠다는 꿈을 접었다. 工學(공학)을 포기하는 대신 인간의 生命을 관장하는 神의 섭리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국 가톨릭의 정신적 지도자가 됐다.
 
  ─司祭가 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1950년대 당시엔 서울大 화공과가 가장 인기 있는 학과였다고 하더군요.
 
  『어린 시절 발명가가 되고 싶었어요. 많은 사람에게 유익이 되는 일이 뭘까 고민했어요. 어린이도서관에 틀어박혀 에디슨 傳記(전기) 같은 책들을 많이 읽고 골똘히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막연하게 「기계 같은 것을 만들면 좋겠구나」 라고 생각했지요. 나만을 위해 산다면 인생의 의미가 별로인 것 같았어요. 그래서 과학자가 되고 싶었죠』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전쟁이 났습니다. 戰時 대학을 다니셨나요.
 
  『서울에서 석 달 동안 숨어 살았습니다. 서울이 수복됐는데 부역자로 의심을 받진 않았어요. 얼굴이 창백하고 장발이어서 숨어다녔다는 표시가 뚜렷했기 때문이지요. 그때는 어려웠어요. 左·右 양쪽에서 의심을 하니까. 당시 6~9월 사이 서울에 있던 청년들이 인민 의용군으로 많이 끌려갔어요. 나중에 들으니 대부분 낙동강 전선에서 죽었다고 하더군요. 저는 용케 살아남았던 거지요. 하지만 얼마 안 있어 중공軍이 몰려와 이젠 피란을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국민방위軍으로 「죽음의 행진」을 하다
 
1961년 3월19일 첫 미사를 집전하며.

  ─어디까지 피란을 가셨습니까.
 
  『1950년 12월 말쯤인가요, 청년들을 강제 피란시키는 명령이 떨어졌어요. 그냥 피란을 보내지 않고, 동네마다 국민방위軍 조직을 결성했어요. 서울 창경원에 모여 대오를 지어 괴나리봇짐 같은 것을 하나씩 지고 길을 떠났습니다.
 
  처음 경기 南楊州(남양주) 德沼(덕소) 쪽으로 갔는데 한밤중에 폭설이 내렸어요. 얼마나 눈이 많이 왔는지, 눈 위에 쓰러져 잠을 청했습니다. 한참 자는데 누가 발로 걷어차요. 「눈 위에서 자면 얼어 죽는다」고. 그래서 다시 걸어 남한강을 건넜습니다』
 
  ─강이 꽁꽁 얼었겠네요.
 
  『그랬죠. 하지만 그 많은 사람이 얼음 위를 건넜으니 얼음이 견디질 못했어요. 제가 건너간 뒤 얼음이 그만 꺼져 버렸어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제 뒤에서 아우성치며 빠져 죽는 광경을 고스란히 목격하게 됐습니다. 겨우 몇 분 차이로 그렇게 된 겁니다. 그게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된 첫 체험이었습니다』
 
  ─德沼, 驪州(여주)를 거쳐 어디로 가셨나요.
 
  『큰길로 못 가고 숨어서 뒷길로 힘겹게 끌려가는 식이었으니 경로를 기억하진 못해요. 다만 문경새재를 넘은 것은 기억납니다. 발바닥이 얼마나 부르텄던지 엉망진창이었어요. 주저앉고 싶었습니다. 그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잠을 잘 데가 없어 산 속으로 기어 올라가야 했고, 다음날 다시 산을 내려와야 했으니 정시 출발이란 꿈도 못 꿨어요. 매번 그렇게 가는 거예요.
 
  하루 10시간 이상씩 걸었는데 주먹밥으로 끼니를 때웠습니다. 그것도 감지덕지했지요. 경북 安東(안동)인지, 義城(의성)인지를 산길을 타고 가는데 제 앞에 가는 사람이 지뢰를 밟았어요. 제가 목격했습니다. 지뢰가 터지니까, 몰려가던 사람들이 모두 죽었지요. 이제는 제 앞에 가던 사람들이 죽은 겁니다. 그래서 또 한 번 죽음을 체험하게 됐습니다』
 
 
  人間의 조건
 
  ─국민방위軍의 행렬이 어디까지 갔습니까.
 
  『경남 馬山(마산)까지 갔습니다. 도착한 뒤 그냥 해산시키는 게 아니라, 초등학교를 하나씩 점령해서 철조망을 쳐놓고 집단생활을 했습니다. 咸安(함안) 어디쯤으로 기억합니다. 국군들이 우리들을 운동장에 세워 놓고 지나가면서 「너 이리 와」 하면서 현역으로 끌고 갔어요. 전선에서 매일 사람이 죽어나가니 보충하려고 한 것이지요.
 
  당시 제가 머무르던 초등학교 책임자가 소령인지, 중령인지 그랬어요. 그에게 기간사병이 필요했던 것 같아요. 사람들을 세워 놓더니, 「중학교 이상 다닌 사람 손 들어 봐」 그래요. 기간사병이 되면 좋을 것 같아 번쩍 손을 들었지요』
 
  ─기간사병이 되고 형편이 나아졌나요.
 
  『기간사병이 되어 장교들 틈에 끼게 되니, 현역들이 저를 (낙동강 전선으로)데려가지 않았어요. 기간사병이 되기 전까지 주먹밥으로 연명했습니다. 매일 교실에 짚을 깔고 누워 잠을 청했습니다. 아침이 되면 한두 명은 꼭 얼어 죽어 있더군요. 일주일에 한 번밖에 변을 보지 않았습니다. 먹은 게 없으니까.
 
  당시 저는 꼬불쳐 둔 돈이 조금 있어 친구하고 김밥을 사서 먹었습니다. 철조망 주변에서 김밥 파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주먹밥에다 김밥을 아껴 먹으며 연명했습니다. 그 김밥을 못 먹었다면 저도 시체가 됐을 겁니다』
 
  ─당시 기억에 남는 일이 있나요.
 
  『잊지 못할 광경이 생각납니다. 주먹밥 크기가 테니스공만 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부식이 나오도록 돼 있었는데 중간에 다 떼먹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사람들이 그 주먹밥이랑 담배를 바꿔 피워요. 주먹밥 한 개가 담배 한 개비입니다. 주먹밥을 다 먹어도 굶어 죽을 판에 담배와 바꾸는 거예요.
 
  그래도 주먹밥 한 개를 다 주면 굶어 죽으니 반으로 나눠 담배 반 개비를 구해요. 거기다 호박잎 누렇게 말라빠진 것을 섞어 피우는 겁니다. 너무 기가 막혀 지금도 기억합니다. 담배가 그렇게 무서운 물건인지 그때 알았어요. 도대체 담배가 뭐기에 저러냐 싶었어요. 담배 피우던 사람들은 그때 다 죽었습니다. 그런 꼴을 보다가 기간사병이 되니 그나마 형편이 나아졌습니다. 그대로 계속 있었다면 저도 죽었을 거예요』
 
 
  인간은 生命보다 쾌락을 우선한다
 
  ─자기가 뻔히 죽을 걸 알면서도 주먹밥과 담배를 바꾼 거군요. 절체절명의 순간에 인간이 생명보다 쾌락을 더 추구한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그게 인간인 거예요』
 
  ─기간사병이 된 뒤 어떻게 생활하셨나요.
 
  『그러다가 국민방위군 사관학교가 생겼습니다. 방위군 사관학교에 갈 만한 사람을 선발하는 일을 제가 했어요. 가만히 생각해 보니 사관학교에 가면 나을 것 같았어요. 뽑는 사람이 저였는데 스스로 저를 뽑았지요(웃음). 그래서 부산 동래 범어사로 가서 교육 비슷한 것을 받았어요. 2000여 명이 한 달 보름간 교육을 받고 소위로 임관했습니다.
 
  당시 大邱(대구)에 국민방위군 사령부가 있었습니다. 5월로 기억이 됩니다. 국민방위군 부식을 떼먹은 사건이 그만 탄로 나서 사령관과 책임자 몇 사람이 사형을 당했습니다. 그 뒤 국민방위군이 자동해산됐죠. 당시로선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해산을 하게 되니 저는 오갈 데가 없게 됐어요』
 
  국민방위군은 1950년 12월 제2국민병으로 편성됐지만 일부 장교들이 국고금과 군수물자를 몰래 빼돌려 餓死者(아사자)와 凍死者(동사자)가 속출해 자그마치 사망자 수가 9만 명에 이르렀다. 이 사건은 국회에서 폭로돼 조사위원회가 꾸려지기도 했다.
 
  당시 국회조사委 보고서를 보면, 1950년 12월17일부터 1951년 3월31일까지 유령인구를 조작해 착복한 금품이 현금 23억원, 쌀 5만2000섬에 달했다. 이 사건으로 申性模(신성모) 국방부 장관이 물러났고 사령관 金潤根(김윤근), 부사령관 尹益憲(윤익헌) 등이 사형에 처해졌다. 국회는 1951년 4월30일 국민방위군의 해체를 결의했다.
 
 
  밤마다 노름으로 지새는 노무자들
 
  ─국민방위軍이 해체되고 나서 어떻게 되셨나요.
 
  『그때 대구에 있던 美軍 보급창에서 사람을 뽑았어요. 청년을 모집한다고 해서 가봤더니, 「어디 다녔냐」고 물어요. 「공대에 다녔다」고 하니, 「영어를 할 줄 아느냐」고 그래요. 「읽을 줄은 안다」고 했더니, 그 자리에서 「영어로 이력서를 써 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썼죠. 그랬더니 통역일을 시켜요. 文官(문관) 정도의 위치였는데 「노무자 100명을 맡으라」고 해요. 그래서 살았어요』
 
  ─통역을 하며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자동차 정비일을 했습니다. 당시엔 戰時 체제니까, 작은 부품을 수리하기보다 큰 덩어리로 부품을 갈아 끼웠어요. 트럭을 타고 강원도 春川(춘천)에 있는 정비부대까지 하루 종일 이동했습니다.
 
  당시 보병들은 200리 밖에 있었고, 戰線이 華川(화천)~金化(김화)에 있었기 때문에 포병부대보다 후방에 있었어요. 거기서 1년 半을 지냈습니다. 처음엔 영어를 읽고 쓰는 것만 했는데, 나중엔 듣고 말하게 됐어요. 100명의 노무자 월급을 제가 정해서 줬습니다. 제 월급까지 제가 정했어요(웃음)』
 
  ─노무자들하고 갈등은 없었나요.
 
  『부대 주변은 철조망이 쳐 있었고 주변엔 전부 지뢰밭이었어요. 노무자들은 정비기술이 있으니 월급이 괜찮았어요. 그런데 밤낮 숙소에서 노름을 하는 거예요. 그럼 제가 잔소리를 하죠. 규율을 잡아야 하니까요. 「처자식 먹여살리기 위해 고생스럽게 여기 와 지내는데 도박을 하면 어떻게 하자는 거냐」고 했지요. 저보다 나이가 적은 사람은 소수였고 대부분 나이가 많았습니다. 어떤 날은 눈빛이 험악해요. 그래서 너무 늦게는 노무자 숙소엔 못 갔습니다. 거기서 죽으면 끝나는 거예요.
 
  그때 무슨 사망신고니 하는 게 있었나요. 「철망 밖에 나갔다가 죽었다」고 보고하면 그것으로 끝이었어요. 잔소리를 했지만 노무자들이 별탈없이 대해 줬어요. 어느 날 제가 떠난다고 하자, 늙수그레한 분이 저를 불러요. 「우리가 당신 말 왜 들었는 줄 알아?」라고 해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다른 사람이 잔소리 하면 욕부터 나왔을 거야. 당신은 어떤 위급한 상황이 닥쳐도 욕을 안 하더군」 그래요. 전혀 뜻밖의 말이었습니다』
 
  ─전쟁 상황에서 어떤 생각을 하셨습니까.
 
  『행정직을 하다 보니 생각할 시간이 많았습니다. 전쟁무기가 다 발명품이잖아요. 그때 자동차 부속품 2만여 개 이름을 영어로 다 꿰었어요. 문득 발명한다는 것만이 옳은 일이 아니다. 마음을 어디에 쓰느냐가 중요하다. 「善用(선용)하면 유익하지만 惡用(악용)하면 흉기가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월간조선 金演光 편집장(가운데), 金泰完 기자(왼쪽)와 대화를 나누는 鄭대주교.

 
  神父님의 고아원 운영 도와
 
  ─공학도를 꿈꾸던 청년이 司祭로 가는 계기가 된 셈이군요.
 
  『그래서 아는 신부님을 찾아갔어요. 당시 신부님은 고아원을 운영하셨는데 美軍이 도와주지 않으면 못 먹고살아요. 신부님도 영어하는 사람이 필요했던 거예요. 저는 「영적 갈등을 너무 많이 느꼈고, 신부님하고 같이 살고 싶다」고 말씀드렸죠』
 
  ─신부님의 반응은 무엇이었나요.
 
  『신부님이 「그래 같이 살자. 잘됐다」 그래요. 그때는 라틴어로 미사를 드릴 때였는데 영어를 조금은 하셔도 구체적인 의사표현을 하실 때는 조금 아쉬우니까 허락하신 것 같습니다. 그때부터 전 「구걸 선수」가 됐습니다. 참, 美軍들 너그러웠어요. 많은 도움을 줬습니다』
 
 
  39세에 최연소 주교 서품
 
  ─마음을 바꾼 모티브는 「죽음」이었겠네요.
 
  『마음을 바꿨다기보다 죽음에 대한 체험이 발명가가 되는 삶의 의미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죽음의 체험이 더 강력한 모티브가 된 셈이지요』
 
  鄭鎭奭 대주교는 이후 성신大(지금의 가톨릭大)에 들어가 1961년 사제서품을 받고 서울대교구 중림동 본당 보좌신부로 첫발을 내딛는다. 이후 성신高 교사로 7년을 재직한 뒤 이탈리아 로마의 우르바노大 대학원에 진학, 교회법으로 석사학위를 받고 귀국한다.
 
  1970년 귀국하자마자 39세의 나이로 최연소 主敎(주교)서품을 받는다. 당시 이런 일화가 있다. 기자들이 그의 어머니를 찾아 소감을 묻자 『감사, 감사, 감사』란 세 마디 말을 하고 기절했다는 것이다.
 
  鄭대주교는 1961년 어느 글에서 神父가 된 일을 이렇게 이야기했다.
 
  <「못난 사람이라야 신부가 된다!」
 
  이는 나를 신학교에 보내 주신 신부님이 내 귀청에 거듭 새겨 주신 말씀이다.
 
  유대인에게 걸려 넘어짐이 되고, 외교인들에게는 어리석음이 되신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선전하려고 나선 나는 미련한 자임이 분명하다. 무릇 有限(유한)한 가치를 몽땅 버리고 구원의 품에 안겨 파릇파릇한 새싹을 싸늘한 壽衣(수의)로 휘감은 뜨거운 송장의 길을 스스로 택한 나는 어리석은 자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나는 하느님 대전에 지혜로운 자가 되도록 세속에 어리석은 자로서 불리었음을 하느님께 무한히 감사드린다>
 
 
  黃禹錫 교수와 나눈 대화의 진실
 
黃禹錫 교수와 鄭鎭奭 대주교.

  鄭鎭奭 대주교는 지난해 6월16일 黃禹錫(황우석) 교수를 만났다. 黃교수 논란이 일어나기 훨씬 전의 일이다. 그 자리에서 두 사람은 인간 배아 줄기세포 연구를 두고 결론 없는 입장차만 확인했다. 당시 그는 黃교수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과학적 연구가 인간 생명과 인간의 미래에 구체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고 있지만, 동시에 생명의학 연구와 관련되는 윤리적 문제들을 풀어 나가기 위해서는 연구자들과 철학 및 사회과학 분야 전문가들의 끊임없는 대화가 필요합니다』
 
  ─당시 黃교수와 만나 무슨 말씀을 나누셨나요? 黃교수의 당시 설명에 따르면, 『꾸지람을 들으러 갔더니 격려를 하셨다』고 하던데요. 어떻게 된 겁니까.
 
  『그 자리에 배석했던 허영엽 신부와 안규리 교수가 밝혔듯이 서로의 입장을 확인했죠. 저는 「배아는 미래의 인간이니까 안 된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黃교수가 「성체 줄기세포 연구가 난치병 환자를 위한 완전무결한 작업이 아니라고 보기 때문에 보완하는 뜻에서 연구를 하는 겁니다」라고 하더군요.
 
  제가 「하지 말라」고 해서 연구를 안 할 사람도 아니고, 그러니까 저도 굳이 「하라, 말라」고 할 수 없었어요. 제가 「배아 줄기세포 연구는 교회에서 엄격히 금지하고 있고,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니, 黃교수가 「말씀 다 압니다」 그래요. 그래서 더 싸울 것도 없었지요』
 
  가톨릭 교회는 배아 줄기세포 연구를 반대하는 대신 성체 줄기세포 연구를 지지하고 있다. 이유는 배아에서 줄기세포를 얻는 방법이 윤리적으로 어긋나기 때문이다.
 
 
  배아는 人間이다
 
  鄭대주교는 지난해 12월4일 명동성당에서 열린 「생명의 날」 기념미사 강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줄기세포를 얻는 방법은 배아와 태어난 사람에게서 얻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그런데 배아에서 얻는 방법은 윤리적으로 어긋납니다. 윤리적으로 어긋나지 않는 방법이 골수나 탯줄에서 줄기세포를 얻는 성체 줄기세포입니다.
 
  우리는 이 성체 줄기세포 연구에 100억원을 지원할 계획입니다. 가톨릭 교회는 윤리적으로 어긋나지 않는 방법으로 불치병 환자 치료를 지원하겠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가톨릭이 난치병 치료를 방해하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습니다』
 
  미래 치료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이유만으로, 불확실한 연구에 실험용으로 쓰이는 배아들의 희생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가 여전히 논란거리다.
 
  ─「9週까지의 배아는 생명체가 아니고, 사람 형태가 되는 32週 이상은 생명체다」라는 주장도 인간의 자의적 판단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배아가 자라서 갓난아기가 되는 것인데 「9週는 인간이 아니다」, 「32週 이상은 인간이다」라는 것을 과연 누가 결정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생각할 때, 생명은 非물질이잖아요. 반면 공학은 물질에 대한 과학이잖아요. 우리는 생각 없이 쓰지만, 생명도 물질로 보고 생명공학이라 하는 겁니다. 배아는 생명인데, 생명공학이라고 부르니까 배아가 물질이 되는 거예요.
 
  냉정하게 볼 때 「생명」하고 「공학」이 절대 어울려선 안 되는 말이에요. 생명은 非물질이고, 공학은 물질을 대상으로 하는 과학이잖아요.
 
  스콜라 철학에 「현실의 존재」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럼 배아는 뭐냐. 「가능태」입니다. 다시 말해 배아는 현재 인간이라기보다 가능태의 인간인 셈이지요. 배아는 커서 짐승이 되는 게 아니라 사람이 되는 거잖아요? 사람의 배아는 사람만 되는 거예요. 다른 것은 안 돼요. 그러니 넒은 의미의 사람이잖아요. 「16週다」, 「32週다」 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안 맞아요. 「하나의 배아를 파괴해서 다른 인간 생명체를 위한다」는 말은 모순 아닙니까. 그래서 배아 줄기세포는 안 됩니다』
 
  ─배아 줄기세포에 대한 가톨릭의 입장은 명확합니까.
 
  『그럼요. 가톨릭에서는 수정체도 인간이라고 봐요. 미래의 인간, 가능태의 인간입니다. 수식어만 붙었지 인간이에요』
 
  ─「환자 맞춤형」 체세포 복제라는 게 환자와 DNA가 서로 일치하는 줄기세포를 얻기 위한 방법이긴 하지만, 「정자와 난자가 만나 수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생명이 아니다」라는 논리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그게 복제잖아요. 복제羊(양) 「돌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난자 핵을 빼내 체세포 핵에 넣는 것, 그게 복제 수정란이잖아요. 그런데 黃禹錫 사태를 보니까 복제 수정란이 있는지 없는지 헷갈리더군요. 어쨌든 엄격한 의미의 수정란이 아니어서 애매하긴 한데, 결과적으로는 복제인간이 탄생할 수 있는 거예요. 그걸 자궁에 착상시키면 복제인간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생명체죠. 난자와 정자의 수정체는 아니지만, 복제인간이 될 위험성이 있는 생명체죠』
 
 
  생명은 물질이 아니다
 
1970년 주교 서품식이 끝난 후 모친인 故 이복순 루시아 여사와 함께.

  ─어디가 神의 영역이고 어디까지가 인간의 영역인지 모호해지고, 가치관이 혼란스럽습니다. 생명윤리를 이야기하면 「불치병 환자의 희망을 꺾으려 하느냐」는 목소리가 거세서, 그동안 제대로 얘기를 꺼낼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가톨릭 역시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의사도 과학자입니다. 사람의 몸, 즉 육신은 물질이잖아요. 하지만 「내」가 물질이라고 할 순 없잖아요? 그러니까, 의사가 「나」를 고치는 게 아니라 「나의 육신」을 고치는 거예요.
 
  엄격한 의미에서 의사는 생명에 대해선 모르는 거예요. 단지 육체에 대한 화학반응을 아는 것일 뿐 어떻게 해서, 어떤 마음에서 병이 났는지 메커니즘은 모르는 겁니다. 「환자를 고쳤다」는 것은 의사가 고쳤다고 말할 수 없어요. 의사가 고치는 데 부분적인 기여를 한 거지, 병은 다른 분이 고치는 거예요.
 
  요새 방송을 보면, 「나」를 물질로 얘기해요. 거듭 얘기하지만, 「내 몸」이 물질이지 「나」는 물질이 아니라구요. 그럼, 우리 생명이 어딨느냐, 뇌에 있는지 심장에 있는지 불확실해요. 분명한 것은 생명이 「나」한테 있다는 겁니다. 생명은 누가 다루느냐. 인간이 어떻게 알아요? 인간이 감지할 수 없는 게 생명이에요. 생명의 현상은 과학자가 알겠지만 생명자체는 못 봅니다. 생명은 물질이 아니니까요』
 
 
  인간의 탐욕과 욕심이 災殃의 뿌리
 
  ─「먹고살기도 힘드는데 무슨 생명윤리냐」, 「BT(생명공학) 산업이 수백조의 國富(국부)를 창출할 수 있는데 무조건 밀어야 한다」라는 생각이 팽배해 있습니다. 외국 언론에서조차 우리나라를 「브레이크가 장착되지 않은 자동차」에 비유합니다.
 
  『사람의 능력을 초월하는 게 아주 많아요. 생명 영역이 그렇지요. 사람이 자기 손 안에 생명을 조작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데 문제가 있어요. 神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이지요. 인간이 얼마나 무능합니까. 인간은 어느 동물보다 능력이 없어요. 뛰지도 못 하고 힘도 약하고, 다른 동물은 나름대로 생존력이 있잖아요.
 
  인간이 왜 만물의 영장입니까. 바로 영혼이 있으니까 가능한 겁니다. 그럼 이 영혼은 누가 제어하나요? 아무도 못 합니다. 누가 감히 순교자의 의지를 꺾을 수 있나요? 순교 의지는 영혼의 능력이 발휘되는 거잖아요』
 
  ─「오래 살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할 수 있다」는 것도 지나친 인간 중심의 사고로 봐야 할까요.
 
  『AIDS(후천성면역결핍증)는 非정상적인 性행위가 없었으면 나오지 않았을 거예요. 性 문란 때문에 시작된 것이지요. 인간의 병이란 상당부분 自業自得(자업자득)의 결과가 아닙니까? 그런 결과를 일으킨 원인은 뭘까요? 불치병과 난치병의 원인은 바로 인간이라고 봅니다.
 
  「善하신 하느님이 인간에게 아무런 이유 없이 그렇게 가혹한 벌을 주실 것 같지는 않다」는 게 제 신념이에요. 증명하라고 하면 증명 못 하지요. 인간의 지나친 욕심·탐욕에 뿌리가 있습니다. 모든 과학적 결과물이 나오면 반드시 악용돼요. 인간의 발명품 중 악용이 안 된 발명품이 없어요.
 
  누가 악용하느냐, 인간의 탐욕이 악용하는 거예요. 여러 가지 법 규정이 있지만 탐욕을 모두 다스릴 순 없어요. 통제하기 시작하면 통제가 통제를 낳아요. 그런데 그것을 계속 뚫고 나가는 것이 탐욕입니다. 탐욕을 다스리는 것이 중요한데, 과학이 탐욕을 막을 순 없어요』
 
  ─얼마 안 있어 인간복제가 이뤄지게 되고, 이미 그 후유증을 생각해야 할 시점이 온 게 아닐까요.
 
  『곧 이뤄진다고 단정하지 마세요. 기형아가 나올 수도 있어요. 사실 어떤 복제인간이 나올지 아무도 몰라요. 괴물이 나올지 누가 압니까. 배아 줄기세포를 이용해 병을 치료하려다가 도리어 암이라는 치명적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는 보고가 있지 않나요? 이런 현상은 이미 동물실험에서 관찰되고 있다고 해요. 복제인간이 어떤 괴물 덩어리가 될지 아직 모르는 거잖아요』
 
 
  2000년 신년사의 경고
 
  鄭대주교는 21세기가 시작되는 2000년 신년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20세기에는 물리법칙에 의거해서 과학이 발전했지만, 21세기는 윤리법칙이 존중되며 발전되기 바랍니다. 21세기에는 정서와 문화적인 측면을 보완하면 균형잡힌 삶을 가꿀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 黃禹錫 사태를 예견이라도 한 말처럼 들린다. BT(Bio Technology·생명공학기술)산업이 國富를 키우는 미래산업으로 인식되던 상황에서 그는 「생뚱맞게」 생명윤리 이야기를 꺼냈다. 하지만 그의 걱정은 현실로 드러났다.
 
  鄭대주교는 2003년 9월에 펴낸 「우주를 알면 하느님이 보인다」에서 배아복제의 문제점을 13개 소제목에 걸쳐 상세하게 설명했다. 그는 가톨릭大 구인회 교수의 글을 인용해 이렇게 밝혔다.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한다면, 배아도 그에 준하는 특별한 배려를 받아야 한다. 임의적 실험이나 수단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평양교구장 서리가 보는 북한의 오늘
 
  鄭대주교는 1998년 6월30일 서울대교구장에 임명되면서 자동으로 「평양교구장 서리」로 임명됐다. 기아에 빠진 북한 주민을 외면해선 안 되는 책임을 진 셈이다.
 
  종교를 「민중의 아편」이라며 탄압하던 북한에 종교인들이 등장한 것은 1972년 7·4 공동성명 발표 이후다. 對南전술의 일환으로 이듬해 「조선기독교도연맹」과 「불교도연맹」, 「천도교중앙지도위원회」가 결성됐다. 천주교의 경우, 1988년 평양 근교에 장충성당을 처음으로 세웠다고 하지만, 주말마다 미사가 이뤄지는지 여부는 확인할 길이 없다.
 
  ─평양교구장 서리를 겸임하고 계신데요. 金日成·金正日 체제下에서 종교가 말살되고 주민들이 노예처럼 살아가는 데 대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말씀드리기가 괴로워요. 북한 주민들이 불행하다는 말을 들을 때 참 안타깝습니다. 소련 붕괴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미국과 나란히 어깨를 견주던 소련이 왜 망했느냐 하면 경쟁이 없는 통제사회라서 능률이 오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통제사회 사람들은 게을러질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 북한 주민이 게으르다고 보는 게 지나친 비약은 아닐 겁니다.
 
  우리가 도와야죠. 천주교에서 지금까지 식량과 비료를 지원하고 국수공장도 차려 주었습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북한 주민 자신들이 먹고사는 방법을 개척토록 해야지, 남이 도와주는 데는 한계가 있어요.
 
  중국은 鄧小平(등소평)이 국유지 땅을 불하해 인민들의 식량 부족을 해결했다고 하잖아요. 북한도 시장경제 체제를 부분적이나마 도입하면 될 텐데 안타까워요. 게다가 요즘엔 배급제로 되돌린다고 하니 「또 뒤로 가네」 하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괴롭습니다』
 
 
  공산주의의 바탕은 유물론
 
로마 유학 시절(1968~1970) 그는 교황 바오로 6세를 알현했다.

  ─가톨릭에서는 공산주의를 어떻게 봅니까.
 
  『공산주의의 바탕이 唯物論(유물론)이잖아요. 또 영혼을 부정하는 無神論(무신론)을 주장합니다. 종교의 두 가지 근본요소인 「하느님」과 「영혼」을 부정하고 있으니 끝이지요』
 
  鄭대주교는 한때 유물론을 열심히 공부한 적이 있었다. 광복 직후였던 중학교 2학년 때 당시 고려大에 다니던 선배에게 이끌려 한 달 동안 변증법적 유물론을 배웠다.
 
  당시는 좌·우익이 갈라져 집단폭력이 난무하던 시대였고, 학교 역시 동맹휴학하는 날들이 많았다. 그 역시 신앙심이 흔들려 성당을 멀리한 일도 있었다.
 
  <유물론이 어려워 듣는 둥 마는 둥 했는데 거기에서 「하느님도 없다」, 「영혼도 없다」고 그래요. 그때의 충격으로 성당에 가느냐, 마느냐를 1년간 고민했죠.
 
  그러던 중 1947년 2월23일~3월30일까지 주일마다 尹亨重(윤형중) 신부님이 논리정연한 논증으로 무신론과 유물론의 오류를 지적하고 하느님과 영혼의 존재를 명쾌하게 설파하는 사순절 특별강연을 하셨습니다.
 
  이 강연을 들으려고 서울 시내의 청장년들이 대성당을 꽉 채웠습니다. 신앙심이 흔들리던 저는 이 강연을 들으면서 하느님의 은혜에 감읍하는 눈물을 걷잡을 수 없이 흘렸습니다(「우주를 알면 하느님이 보인다」 中에서)>
 
  ─공산주의 국가는 神의 자리에 공산당을 대신 올려놓았죠. 그리고 그 黨을 장악한 스탈린이나 毛澤東(모택동)이 절대神으로 군림했죠. 金日成·金正日 체제는 신학적으로 어떻게 보십니까.
 
  『신격화한 것이지요. 그러니까 우스꽝스럽잖아요. 죽은 사람(金日成)이 영생한다고 하니 헷갈리잖아요. 시체에 분을 발라 화장하고 전시한다고 하니….공산주의자들은 유물론자들로 물질과 과학을 발전시키는 사상체계를 강조하는데, 시체를 전시시켜 영생한다고 하니까, 「이 사람들 모순된 말 잘하네」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제가 이상하게 생각되는 것은 북한 주민들이 행복한지, 불행한지 판단하기 어렵다는 겁니다. 만약에 정 죽겠다 싶으면 저 체제가 어떻게 존속해요? 그게 참 이상해요』
 
 
  『북한 주민들은 집단최면 상태』
 
  ─북한에서 굶어 죽은 수백만 명의 사람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사람이 극단적인 상황에 직면하면 가만있지 않잖아요. 「북한 사람들은 왜 저렇게 가만히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어 이해하기가 쉽지 않아요. 백성을 통치한다는 게 참으로 어렵잖아요? 어떤 식으로든 도저히 먹고살 수 없으면 「못살겠다 갈아 보자」는 혁명이 폭발했습니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아직 못살겠다는 내적 폭발이 안 나오고 있어요』
 
  ─반항할 기력조차 없어서 그 자리에 앉아 그냥 굶어 죽고 있는 것 아닐까요.
 
  『아, 글쎄… 사람은 안 그렇다구요. 진짜 못 살겠으면 갈아엎자고 일어섭니다. 그런데 북한은 그게 아니에요. 그럼 어떻게 분석할 수 있느냐. 최면에 걸리면 현실을 직시할 수 없어요. 객관적으로는 견딜 수 없는 환경인데, 최면에 걸리면 「난 편안해, 불만 없어」라고 거꾸로 말해요. 북한 주민들이 절대빈곤 속에서도 아직 동요가 없으니 통치자가 잘하는 걸로 착각할 수도 있죠』
 
  ─희망의 불씨가 없어 모든 희망을 포기한 것 아니겠습니까. 요한바오로 2세가 고향 폴란드의 자유노조 「솔리대리티(연대)」 운동을 지지하면서 공산주의 붕괴의 단초를 열었습니다. 대주교님께서 북한에서 변화의 물결이 있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북한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비약해서 이야기하자면 통치 수준은 국민수준에 달렸다고 봐요. 어디든지 해당되는 말이에요. 거짓으로, 임기응변으로 통치할 때 속아 넘어가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게 국민의 수준입니다. 국민이 똑똑해서 통치자의 생각을 꿰뚫어 볼 수 있다면 통치자가 올바로 통치하겠죠. 근데 국민들이 이렇게 통치자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니까 문제입니다. 가당찮은 정책발표에 덩달아 넘어가니…. 우스꽝스럽잖아요』
 
  ─그래도 「북한 주민이 못나서 저런 폭정 아래서 살고 있다」고 하기에는, 북한 주민들이 처한 상황이 너무 참혹한 것 같습니다.
 
  『제 표현이 과했던 것 같아요. 너무 가슴 아프고 도와줘야 해요. 그러나 「북한주민들 스스로 깨달아야 되지 않느냐」 하는 안타까움이 있지요. 국민들이 똑똑하면 통치자가 나쁜 짓을 못 한다고 생각합니다. 피통치자들이 조금 어수룩하고 미련해서 통치자가 끌고 가는 대로 끌려가니 개선이 늦어집니다. 집단최면에 걸렸을 수도 있고, 가혹하게 탄압을 당하니 반발 못 하는 측면도 있습니다』
 
  鄭鎭奭 대주교는 성신高 교사(1961 ~1967)와 부교장(1967~1968)을 역임했다. 1970년부터 청주 가톨릭학원 이사장을 맡기도 했다. 鄭대주교는 지난해 말 통과된 私學法(사학법) 개정에 매우 비판적이었다.
 
  金壽煥 추기경은 지난 1월3일 私學法 개정에 우려를 표명하며 『(정부가) 私學法을 바꾸려는 동기에 대해 굳이 그렇게 하려고 하는 이유가 단순히 私學비리를 없애는 데 있다기보다 실제로는 숨은 뜻이 있는 것 같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학교 선택권 부여해야 私學 비리 사라져
 
  ─성신高에서 교직생활을 하셨더군요. 현재 한국 천주교가 운영 중인 私學은 몇 개입니까.
 
  『가톨릭大를 포함해 전국에 80여 개 학교가 있습니다』
 
  ─가톨릭이 이번 私學法 개정을 반대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가톨릭계 학교들은 한 번도 비리가 문제된 적이 없는 것으로 압니다. 「개방형 이사제」를 하더라도 큰 불편이 없을 텐데.
 
  『국·공립학교는 국가가 세워 운영하니까 국가가 이끌어 가야 하지만, 사립학교는 사립의 자율을 인정해 줘야 됩니다. 이런 방향으로 私學法을 개정해서 私學비리가 근절이 되느냐, 하면 저는 회의적입니다. 私學이 비리를 저지르면 존립할 수 없는 환경을 만들면 됩니다. 그게 뭐냐 하면, 바로 학교 선택권입니다. 선택권만 학생에게 되돌려 주면 언짢은 학교에 누가 지원하겠습니까. 비리 학교는 스스로 문을 닫거나 고쳐질 겁니다.
 
  그런데 공립은 학교 선택권을 덜 줘도 됩니다. 공립이니까. 사관학교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지요. 하지만 私學은 반대입니다. 선택해서 들어가는 거지 강제로 들어가지 않잖아요. 학교 선택권을 학생에게 주면, 私學의 본래 의미가 살아난다고 봅니다. 그렇게 되면 언짢은 학교는 자동 도태되겠죠』
 
  ─그런데 학교 선택권은 평준화 정책과 걸려 있어서 해결이 간단치 않아 보입니다. 私學에 선택권을 주면 평준화가 무너지기 때문에 정부가 私學에 대한 통제권을 놓지 않으려고 하는 겁니다.
 
  『30년 전 왜 평준화가 됐느냐를 생각해 봐요. 과외 때문에 됐잖아요. 가난한 아이들은 과외를 못 받으니까, 어린 학생들이 억울한 차별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어요. 평등교육에서 나온 겁니다. 30년이 지난 지금 우리 사회는 많이 바뀌었습니다. 기존 제도를 한번쯤 다시 반성해 볼 시기가 됐다고 봐요.
 
  현재 우리나라의 私교육비가 30년 전보다 더 심해졌다고 봅니다. 요즘엔 초등학생까지 유학을 간다는군요. 이게 무슨 소리예요. 중·고교생들 유학은 국가적 낭비예요. 해외여행 10조원, 유학 5조원을 더해 15조원이 해마다 외국으로 나간다고 하더군요. 왜 어린 학생들이 기를 쓰고 외국에 가느냐, 평준화 교육에 대한 불만의 표시 아닙니까. 평준화제도를 한번 되짚어 볼 시점이 아니겠냐는 겁니다』
 
  ─자립형 사립학교 스타일로 私學을 풀어야 한다는 말씀이군요.
 
  『현재로서는 자립형 사립高가 가장 좋은 私學의 전형이자 본보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자립형 고교가 100% 다 모범이고 옳다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제도가 100% 옳은 게 없으니까요.
 
  자립형 私學은 평준화보다 영재교육을 위해서 좋다고 봅니다. 그런데 영재교육이란 말 자체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더군요. 국가를 누가 이끕니까? 뻔한 사람, 똑같은 사람이면 누가 지도자가 되고 누가 피지도자가 되나요? 사관학교는 장교를 양성하는 학교인데, 사병 없이 장교만 있으면 되나요? 평준화란 장교를 인정하지 않는 거잖아요』
 
 
  全敎組가 변질됐다
 
  鄭대주교는 지난해 12월19일 金桭杓(김진표) 교육부총리를 만나서 이렇게 강조했다고 한다.
 
  『현재 자립형 사립高가 잘 운영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학교 평준화로 인해 사라졌던 학부모나 학생들의 학교 선택권을 되돌려 줘야 합니다. 한국 같은 통제국가였다면 맹자의 모친도 이사를 못 했을 거예요. 한국의 학부모가 교육에 대한 열정이 더하면 더했지 덜 하지는 않은데, 왜 학교 선택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지 모르겠어요』
 
  ─金부총리에게 새 私學法이 「공산주의적 통제」를 강요한다고 하셨던데.
 
  『말 그대로입니다』
 
  ─새 私學法이 발효되면 어떤 점이 불편하십니까.
 
  『全敎組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네요. 15년 전 全敎組가 출범할 당시 그들의 말에 옳은 게 있었고, 다 옳지는 않더라도 그중 옳은 게 있었다고 봅니다. 그러나 오늘날 全敎組가 변질됐다는 게 일반적인 평론이에요. 변질됐다는 단적인 예가 교사 평가를 거부한 거예요.
 
  왜 거부했느냐. 그분들은 「학생이 스승을 어떻게 평가하느냐」고 하는데, 처음 全敎組를 만들 때는 「우리는 스승이 아니라 교원 노동자」라고 했잖아요. 왜 말이 다르냐는 겁니다. 자신 있는 교사는 교원평가를 거부하지 않아요. 교원평가를 받으면 오히려 더 떳떳해지는 거죠. 학생들 앞에 자신 있게 더 잘 가르치게 돼요. 가르치는 노력을 위해서는 시장경쟁 원리에 의해 평가받아야 합니다. 밖에 있는 사람들은 全敎組가 처음 출발할 때와 달라졌다고 보고 있습니다』
 
  ─가톨릭 私學에서도 일부 全敎組 교사들이 反APEC·反美·反세계화 강의를 했나요.
 
  『보기 나름이긴 하지만 APEC 반대교육을 보니… 그러면 위험하지요. 그런 것은 안 되는 거지요. 서로 타협하며 올바른 길을 찾아 나가는 게 지혜를 모으는 첩경입니다. 혼자만 옳다고 주장하면 서로 어려워지지요』
 
 
  가톨릭에서는 이미 개방형 이사제 실시
 
사제서품 25주년 기념미사에서. 김수환 추기경이 축사를 하고 있다.

  ─개방형 이사제를 하면 全敎組와 관련된 이들이 이사회에 진출할 걸로 보십니까.
 
  『일반 私學 경영자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조직화된 사람들을 두려워하는 거지요. 가톨릭에서는 이미 개방형 이사제를 실천하고 있으니까요. 이번 私學法 개정에 특별히 영향받는 것은 없습니다』
 
  ─미국의 경우, 정부의 돈을 받는 학교는 철저한 통제를 받는 대신 돈을 받지 않는 학교는 아무런 간섭이 없습니다. 私學은 말 그대로 학교 마음대로 운영하는 거죠.
 
  『미국과 같이 될 수는 없지만 비슷하게 되면 좋겠죠. 私學은 근본적으로 자율을 인정해 줘야 한다고 봅니다. 자립형 고교가 학생을 선발할 때 정부가 간섭하는 일은 없습니다. 수업료 책정도 3배만 받으라는 권고뿐입니다. 가급적 그런 방향으로 가는 게 좋겠다는 게 제 판단입니다』
 
  ─일부 私學들이 신입생 배정을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앞으로 가톨릭이 私學들의 私學法 불복종 투쟁에 동참하는 건가요.
 
  『私學法 토론이 충분히 되지 않은 상태에서 좀 껄끄럽게 통과됐잖아요. 국회 법사委를 안 거쳤어요. 법사委를 거치지 않았다는 게 바로 절차상 하자가 있다는 뜻이 아닙니까. 또 통과됐다고 하지만 본회의장 단상을 점령하고 뚝딱뚝딱 했는데, 「의원 중에 전자투표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도 있는 것 같다」는 말이 나옵니다. 그래서 다시 의논할 기회를 주는 게 옳다는 것이지요. 대통령이 다시 생각해 주었으면 합니다』
 
  ─盧武鉉 대통령이 이미 거부권 행사를 거부하지 않았습니까. 「私學비리를 척결하겠다」고 나서는 형편인데.
 
  『다시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아니면 어떤 모양으로 다시 타협을 하든지, 할 수 있지 않겠어요?』
 
  ─안 되면 私學法 불복종 대열에 동참하시는 겁니까.
 
  『글쎄… 그것은 그때 가봐야 알지요. 내일을 어떻게 알아요』
 
  鄭鎭奭 대주교에게 「삶의 지표로 삼는 경구가 있으면 들려 달라」고 했다.
 
  『평범해요. 저게 주어진 하루를 성실하게 사는 겁니다. 「내년에 교구를 어떻게 이끌까」 하는 멀리 바라보는 생각도 하지만, 개인적인 삶은 오늘 하루 주어진 이 시간을 가장 성실하게 살려고 노력합니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인터넷을 잘하십니까.
 
  『겨우 유치원생 수준입니다(웃음)』
 
  ─젊은이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들려주세요.
 
  『「너 개인을 위해 살지 말고 많은 사람에게 유익이 되는 일을 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고교 시절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합니다. 하지만 우리 학생들은 대학입시에 모든 시간을 낭비하니까 제일 안타까워요. 그때가 인생의 꿈을 키우는 중요한 시기인데 시험 보는 기계로 만듭니다. 가슴 아픈 일이에요』
 
 
  『「인간이 뭐냐」고 깊이 생각할 때 온다』
 
  ─양극화 문제가 어느 때보다 심합니다.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이 늘어날수록 교회의 책임이 무거워지는 것 아닙니까.
 
  『교회의 근본정신은 「지구가 하나」라는 겁니다. 지구는 공유재산입니다. 지구는 한계가 있잖아요? 혼자 독점하려는 과욕과 탐욕이 불행을 낳습니다. 가능하면 서로가 나눠 써야 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죽을 때 다 놓고 가잖아요? 맨손으로 태어나서 알몸으로 가는 게 인간입니다. 그것을 모든 사람이 항상 자각하고 살아야 합니다』
 
  ─유럽 가톨릭의 경우 신자 수가 줄어들어 성당이 레스토랑이나 박물관·극장으로 변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아시아에서는 영성을 중요시하는 전통이 계속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교회가 한번 내려갔다가 올라갔다가 하는 것 같아요. 중세는 神 중심으로 됐다가 이후 인간 중심으로 바뀌었고, 요즘은 뭐가 중심인가요? 「물질」이 중심인가요? 그러다 아쉬워지면 절대자를 간절히 필요로 하는 때가 오겠지요.
 
  지금 核전쟁이 일어난다면 뭘 바라보겠어요. 언제고 「인간이 뭐냐」 하는 것을 다시 깊이 생각할 때가 올 겁니다』
 
  몇 년 전 그는 全재산을 털어 장학금을 쾌척했다. 충북 음성 꽃동네에 있는 현도사회복지大에 40년간 司祭생활을 하며 모은 재산을 모두 내놓은 것이다.
 
  『당시 제가 청주교구장으로 있던 시절이었는데, 한번은 오웅진 신부가 찾아와 「복지大에 주로 가난한 수녀님들이 입학하는데, 4년간 학비를 감당할 수 없어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걱정을 해요.
 
  수도자가 복지사가 되면 아주 이상적인 복지사가 되지 않겠어요? 저는 작은 돈을 냈고, 그게 씨앗이 되어 많은 돈이 모였답니다. 요즘도 수도자 학생들이 졸업했다고 제게 찾아와 인사해요』
 
 
  한국서 두 번째 추기경 배출될까?
 
  ─올 2월쯤 교황청이 한국에 두 번째 추기경을 선출한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교황님의 고유권한입니다. 아무도 몰라요(웃음)』
 
  한국 천주교 내부에서는 새 추기경 후보로 鄭대주교를 비롯해 대구대교구장 이문희(70) 대주교, 광주대교구장 최창무(69) 대주교, 춘천교구장 장익(72) 주교, 부산교구장 정명조(70) 주교, 제주교구장 강우일(60) 주교, 의정부교구장 이한택(71) 주교 등을 꼽고 있다.
 
  하지만 누가 될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그의 말대로 하느님과 교황만이 알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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