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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공 25회 정범식 동문 관련 글

조회 수 24844 추천 수 0 2013.03.28 15:00:00
화학생물관리자

 

[엔지니어열전④] 국내 석유화학산업의 산증인 정범식 롯데케미칼 총괄사장
비오면 삿갓 쓰고 공부하던 가난한 어린 시절 생생…현재 대한민국 발전 일조 보람
공부 더하고 싶었으나 생계 의무에 엔지니어 선택…“한 번도 사표 쓸 생각 안 했다”

 

“충주비료, 한국종합화학공업, 호남석유화학, 현대석유화학, 롯데케미칼…. 내 프로필을 보면 회사 이름이 정말 많이 등장하는데, 이름은 달라졌어도 다 같은 회사입니다. 40년간 사표 쓴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요.”

 

정범식 롯데케미칼 총괄사장을 가장 잘 설명하는 수식어는 ‘국내 석유화학산업의 산증인’이다. 그는 석유화학산업의 태동기에 뛰어들어 무려 42년 동안 현장을 지켜온 업계 최고의 전문가이기 때문이다. 정부가 공장을 짓기 위해 설립한 합작회사에 따라 사명(社名)이 바뀌고, 민간으로 개발주체가 바뀌는 등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그는 늘 그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열심이었다. 교대근무를 하는 기능직 기술자에서 시작해 공정개선 엔지니어로, 공장 설립 책임자로, 회사 경영자로 성장한 그의 일대기는 40년 만에 180배 성장한 그의 회사만큼이나 신화에 가깝다. 

 

특히 '산업의 쌀'로 불리는 에틸렌 생산능력을 국내 최대 규모로 키우는 등 주력제품에 대한 지속적인 공장증설과 사업 확장은 그의 대표적인 작품. 호남석유화학은 직원 1인당 생산성 1위로 산업계 전체에서 주목받기도 했다.

 

석유화학공업은 원유 또는 천연가스를 정제해서 휘발유, 경유, 중질유는 물론이고 나프타, 에틸렌, 프로필렌, 벤젠 등의 기초 유분을 생산하거나 기초 유분을 원료로 합성수지, 합섬원료, 합성고무 등의 유도품을 생산하는 것을 말한다. 이를 기반으로 산업 및 가정의 에너지원과 각종 생필품을 비롯해서 첨단산업의 기초소재 등이 만들어지므로 석유화학공업은 선진공업국에서 기간산업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때문에 우리나라도 1960년대 초 경제개발5개년 계획을 세울 때 가장 먼저 육성시킨 분야 중의 하나가 석유화학공업이다.

 

경남 창원의 수재였던 정범식 사장이 우리나라 석유화학산업의 최고 전문가로 성장하는 발자취를 따라가 봤다. 거기에는 한 엔지니어의 열정과 뚝심, 그리고 세계 최빈국 중 하나가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기적과 같은 경제발전사가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 1960년대 : “추석날 태풍이 와서 초가집 지붕이 날아갔다…슬레이트 지붕은 대학 가서나 봤지”

 

요즘은 박물관에나 가야 볼 수 있는 초가집이 당시엔 가장 보편적인 주거공간이었다. 태풍이 오면 지붕이 날아갔고, 운이 좋게 무사히 지나가도 1년마다 새로 지붕을 이어야 했다. 요즘은 발암물질이 나온다며 기피하는 슬레이트 지붕이 등장하는 것도 10년은 더 지난 후의 일이다. 오래 전 일이지만 1959년 추석날 사라호태풍으로 지붕이 날아갔던 경험은 아직도 생생하다. 지금이야 그 때 혼비백산했던 장면을 생각하면 웃음이 절로나지만 당시엔 심각했다.

 

학교에 가도 책걸상은 없었다. 바닥에 앉아서 공부했고, 여기저기서 물려받은 너덜너덜한 책은 보자기에 싸서 등에 매고 다녔다. 비가 오면 삿갓이나 마대를 쓰고 공부했다. 태반이 도시락을 싸오지 못했다.

 

그 환경에서도 인재는 키워졌다. 경남 창원에서 태어난 그는 고등학교부터 부산에서 다니며 부산고 수재로 통했다. 모두가 넉넉지 않은 형편이었지만 친지들과 주변 이웃들은 그가 학업을 이어갈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왜 자신의 꿈이 과학자였는지 너무나 당연해서 궁금해 해본적도 없었다. 그 시대 아이들의 꿈은 과학자와 장군, 대통령 등 세 부류로 나눠졌다고 했다.

 

그가 대학에 입학하던 1967년, 가장 최첨단산업은 석유화학이었다. 막 태동한 석유화학산업이 국민들의 의식주를 모두 변화시키고 인류의 삶의 질을 한 단계 끌어올릴 것이란 기대가 컸던 시기였다. 언론에서도 석유화학에 대한 특집기사가 연일 쏟아져 나왔다. 그가 입학한 서울대 화학공학과는 최고 인재들만 모이는 인기 학과였다. 그 인기는 지금의 의대를 능가했다. 꿈이 장군인 친구들 중에서 일부러 서울대 화공과 시험을 본 후 사관학교에 들어가는 사람도 있었다. ‘서울대 화공과 합격’은 최고 수재에 대한 보증수표 같았다.

 

집안 친지의 도움으로 첫 등록금을 마련한 그는 이후 대학생활 내내 모든 등록금과 학비를 직접 과외로 벌었다. 어렵게 다닌 학교였는데 당시 실험실이나 교재 등 교육환경이 열악했기 때문에 늘 아쉬움이 있었다. 2학년 때에는 서울대 공대 건물에 교양학부가 들어오며 모든 학생들이 시위에 휩쓸리기도 했다. 그도 시위에 참여했다가 청량리경찰서에 붙잡혀 간 적이 있다. 졸업 즈음해선 제대로 화학공부를 더 하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그는 가난한 집안의 장남이었다. 바로 취직해서 집안에 경제적으로 도움을 줘야 했다.

 

# 1970년대 : “당시 외국인들에게 한국의 기업이라곤 ‘충주비료’가 유일했다”

 

그가 입사한 충주비료는 국내에서 만든 첫 번째 화학비료 공장이었고, 당시 가장 번듯한 대기업이었다. 1960년대 외국에서 볼 때 한국의 기업이라곤 충주비료 밖에 없을 정도. 충주비료를 중심으로 여천에 석유화학단지가 조성됐고, 충주비료를 주축으로 울산에 영남화학공장과 진해에 진해화학공장들을 건설했다. 덕분에 충주비료에는 뛰어난 인재들이 모여들었고, 이후 한국화학공업에서 충주비료 출신들의 역할은 매우 컸다. 충주비료는 여러 합작회사들을 설립한 후 분해되며 인재들도 같이 흩어졌는데, 엔지니어들이 경영진으로 기용되기 시작한 1980년대부터 대부분의 석유화학회사의 사장 자리를 충주비료 출신들이 꿰찼다. 

 

충주비료에서 그의 첫 역할은 기능직 기술자였다. 입사 후 2년 동안은 교대근무를 하며 기기를 운전하는 일을 했다. 공장 가동을 살피며 현장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능력을 인정받아 기술부로 가서 공정 개선을 개발하는 엔지니어가 됐다. 그후 나중에 호남석유화학에서 엔지니어로서 그가 동료들과 개발한 ‘폴리올레핀(polyolefine) 공정 시스템’은 한국공학한림원이 선정한 ‘60년 동안 우리나라의 경제성장을 이끈 100대 기술’에도 포함됐다.

 

그즈음 충주비료는 호남비료와 합병, 한국종합화학공업으로 승계됐으며, 이후 호남석유화학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는 현재 우리나라 대부분의 석유화학 공장의 모태가 된 충주비료가 사라진 사실에 여전히 아쉬움을 느낀다.

 

# 1990년대 : “일본 기술자에게 하나하나 배워 익힌 기술로 30개 공장을 짓다”

 

국내 석유화학산업에서 원천기술을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그 전에 원천기술은 전부 외국에서 도입했다. 당시에는 성장속도와 물가상승이 워낙 가파르게 올라가던 시기여서 이미 있는 기술로 매출을 올리는 것이 우선시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국내 기술자들의 배우는 속도와 응용력은 매우 뛰어났다. 1960년대 일본인 기술자들에게 하나하나 배워가며 공장을 지었던 것을 기초로 국내에 하나 둘 공장을 늘려갔고, 1990년대에는 해외 건설 플랜트 사업을 벌이게 됐다.

 

그의 임무도 어느새 신규 공장 설립을 기획하고 주주들을 설득해 실제로 짓는 것으로 발전했다. 국내외 30여개 공장이 그의 손을 거쳤다.

 

그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세 번째로 지은 에틸렌글리콜 공장. 당시 에틸렌글리콜 가격이 폭락했고 관련 시장의 성장이 멈출 것이라는 전망도 나올 때였다. 주변에서 신규 공장 설립을 재검토해보자는 의견이 나올 때 그는 오히려 규모를 더욱 크게 키워 설립하자고 주장했다. 당장의 전망은 어두웠지만 기술에 대한 확신이 있었고 세계적인 추세를 볼 때 일정 규모 이상을 갖춰야 보다 경쟁력이 있었다.

 

결국 그의 주장대로 신규공장이 완공된 1996년. 완공 직후 에틸렌글리콜 가격은 3~4배 폭등했고, 800억을 들여 지은 공장이 1년 만에 1000억 수익을 올렸다. 에틸렌글리콜 가격은 이후 10년이 넘도록 지속됐고, 해당 공장은 호남석유화학의 일등 효자 공장이 됐다.

 

물론 지속적인 성과를 내오던 그도 경영자로서 위기를 느꼈던 적이 있다. 이유는 공장 설립이나 매출이 아니라, 사람들. 대덕연구단지로 회사를 이전하자 인재들이 모두 떠날 뻔 한 적이 있는데, 주변에 있는 대기업 연구소와 공공연구기관들을 보며 여천에 있을 때는 못 느꼈던 위화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는 직접 고민하는 후배들을 찾아다니며 술과 밥을 사주며 회사에 대한 확신을 심어줬고, 실제로 호남석유화학은 오히려 IMF를 거치며 크게 성장해 진가를 드러냈다. 당시 신규 공장을 지속적으로 지은 건 호남석유화학이 유일했다. 당시 그가 지켜냈던 후배들이 현재는 임원으로 승진해 일하고 있다.

 

# 2013년 : “만약 과학에 흥미를 느낀다면, 업(業)으로 삼아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

 

“작년 매출이 18조원이었습니다. 영업초년도에 1000억원이었으니 180배 성장한 거지요. 우리 회사뿐 아니라 대한민국 사회도 그만큼 격변했을 겁니다. 세계 5위 수준의 화학산업 강국으로 발전하고 국가경제와 산업발전에 일조했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낍니다. 또 과거에는 엄청난 로열티를 지불하며 해외 석유화학기술자들로부터 공장을 운영하는 전문기술을 배웠지만, 지금은 해외석유화학 공장에 우리 기술자를 파견해 기술을 전수하며 새로운 수익을 창출하고 있는 것도 큰 기쁨입니다.”

 

현재 국내 화학산업의 수준을 이야기하는 정범식 사장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살짝 엿보였다 사라졌다. 전형적인 경상도사나이인 정 사장은 부드러운 인상과 달리 말수도 적고 절대 과장하는 법이 없었다. 자신의 성과에 대해서도 “공장 잘 돌리고 그저 열심히 한 것뿐”이라며 겸손해 하는 것이 전부. 그러한 과묵하고 우직한 성격 덕에 경기 변동에 영향을 많이 받는 화학 산업에서 주변에 휩쓸리지 않고 끈기 있게 성과를 낸 것이라는 주변의 평도 있다.

 

하지만 일에서 느끼는 보람이나 화학산업에 대한 애정을 이야기할 때는 감출 수 없는 자부심과 기쁨이 눈가와 입가를 통해 조금씩 배어나왔다.
 
특히 최근 그는 사업에서 성과를 내는 것 못지않게 대중들의 화학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견을 없애는 것에 힘을 쓰고 있다. 2006년부터 2010년까지는 한국RC(Responsible Care)협회장을 맡아 환경·안전·보건 증진이 화학업체의 중심 활동으로 자리매김하도록 관련 시스템을 구축해 왔다. RC운동은 법이 강제되기 이전에 화학회사 스스로가 화학제조물 제작 공정과 사후처리에 대해 지역주민들에게 투명하게 공유하자는 움직임이다.

 

그는 “화학은 웰빙(well-being)이나 환경과 대치된다는 인식이 있는데 그렇지 않다”며 “화학의 도움 없이 현재의 문명생활을 유지한다면 환경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설명했다. 현재 국내 공장에서 만들어지는 화학섬유를 천연목화로 제작하려면 남한 땅의 절반쯤, 양모로 한다면 중국 땅 전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정 사장은 “산업계에서 취급 물질을 안전하게 잘 관리해야 하는 것은 기본이고, 대중들의 부정적인 인식을 없애기 위해서도 더욱 노력해야 한다”며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강연 등을 통해 화학산업에 대해 올바른 이해를 돕기 위해 일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가 이 외에 또 하나 노력하고 있는 것은 현재 대학생들이 이공계에서 꿈을 키우도록 돕는 것이다. 그는 “몇몇 재단에서 운영하는 멘토 프로그램을 통해 젊은 사람들의 생각도 듣고 조언을 할 계획”이라며 마지막으로 현재 대학생들에게 조언을 남겼다.

 

“우리나라가 앞으로 한 번 더 도약하려면 과학기술 중심의 사회가 되어야 하는 것은 맞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학을 전공해서 후회할 일은 없을 겁니다. 수학이나 물리, 화학 등에 흥미를 못 느끼면 고통스럽겠지만, 그런 것에 재미를 느끼는 사람들은 열심히 해서 과학을 발전시키길 바랍니다. 지금은 그 중요성을 잘 못 느끼겠지만, 중고등학교때 기초학문에서 수준 높은 지식을 쌓은 사람들은 후에 한 차원 높은 사고를 할 수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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